이현주 더킹핀 Senior Researcher
2025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변화의 중심에 선 그녀의 이름은 커스티 코벤트리(Kirsty Coventry). IOC 131년 역사상 최초의 여성 위원장, 게다가 변방으로 인식되는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신 인물이다. 이는 단순한 뉴스 이상의 전환점이다. 마치 ‘금단의 구역’ 같았던 남성 중심 IOC 구조 한가운데, 여성이 정면으로 들어선 역사적인 순간이다.
“현대의 아테나”로 불릴 수 있을까?
그녀의 등장을 보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리스 신화 속 아테나 여신을 떠올렸다. 아테나는 지혜, 전략, 정의, 전쟁을 관장하는 여신으로서 올림포스의 남신들과 대등하게 맞섰던 유일한 여성이었다. 나는 IOC라는 국제 스포츠 정치의 정점에 선 커스티 코벤트리를 “현대의 아테나”라 부르고 싶다.
국제기구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장벽들
나는 스위스 제네바 UN본부에서 **UNOSDP(유엔 스포츠 개발과 평화 사무국)**의 사무국장으로 일했고, 스위스 로잔에서는 국제 대학 스포츠 연맹, 국제 카누 연맹과 함께 일했다. 현재는 Commonwealth Women’s Sport Leadership Programme의 멘토로, 또 글로벌 스포츠 기관인 더킹핀의 시니어 리서처로 활동하고 있다.
18년 넘게 국제 스포츠의 중심에서 활동해오는 동안 여성이자 아시안이라는 이유만으로 수많은 보이지 않는 장벽과 마주해왔다. 공식 회의보다 더 많은 결정이 이루어지는 비공식 친목 모임에 배제되는 건 일상이었고, “너가 뭘 알겠어?” 같은 은근한 편견과 의심은 늘 따라다녔다. 질투, 시기, 고립감 속에서 매일 퍼덕이며 싸워야 했고, 그 과정에서 여성의 인권과 스포츠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더욱 깊은 고민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경험을 통해 나는 절박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IOC 같은 조직에 왜 여성 리더십이 절실히 필요한지를.
스포츠 세계에서 여성은 아직도 ‘예외’인가?
2023년, SIGA(Sport Integrity Global Alliance) 발표에 따르면, 전 세계 31개의 국제 스포츠기구 중 여성 사무총장은 단 5명, 여성 회장은 단 3명에 불과했다. IOC는 1894년 설립 이래100년이 넘도록 여성 사무국장을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했다.
또한 IOC 산하 206개 국가올림픽위원회(NOC) 중 여성 위원장이 이끄는 곳은 단 24개국, 파리 2024 올림픽에 참가한 여성 코치의 비율도 약 10% 수준에 그쳤다 (출처: UN Women, IOC Gender Equality Reports). 이 수치들은 충격적이지만, 놀랍지는 않다. 스포츠 세계는 여전히 남성들의 소유물이자, 여성 리더십은 ‘예외’로 간주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최근 멘토로 활동하고 있는 커먼웰스 여성 리더십 프로그램에서 만난, 오세아니아의 작은 섬나라 키리바시 출신의 여성 리더의 말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여성에게 기회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 엄혹한 또 다른 현실이 지구상에 아직도 많이 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역사상 단 한 번도 여성이 스포츠 지도자, 심판, 협회장이 된 적이 없어요. 남자들이 자기 자리를 여자에게 내주는 걸 상상조차 하지 않거든요.”
세상에는 아직도 여성은 제한된 꿈만 꿀 수밖에 없는 나라들이 너무나 많다.
최초이자, 유일하지 않기를
커스티 코벤트리는IOC 인터뷰 중에서2024년 UN 국제 여성의 날을 맞아 이렇게 말했다.
“자신을 믿으세요. 목소리를 내세요.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실패는 오히려 성장을 위한 기회입니다.”
그녀는 리더십을 ‘이끄는 능력’이 아니라 경청하고 포용하는 힘이라 정의했다. 여성이 리더로 설 때, 단순히 남성과 동일한 방식의 권위가 아니라, 더 많은 목소리를 듣고 함께 성장하는 방식으로 리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녀는 여성들에게 멘토를 찾고, 네트워크를 넓히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눌 것을 당부했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녀의 이 말은 단지 개인적인 조언이 아니다. 전 세계 여성들에게 전하는 선언문이자, 지금껏 무대 뒤에 머물러야 했던 여성들을 무대 위로 이끄는 소리 없는 혁명이다. 여성 리더십이 스포츠세상을 바꾼다
커스티 코벤트리는 유리천장을 깬 리더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그 천장을 깨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유리 파편 위를 다음 세대가 걷지 않아도 되도록 길을 닦아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녀가 지닌 정체성, 여성, 아프리카인, 글로벌 사우스의 목소리, 개발도상국 지도자 등,이 모든 것은 곧 IOC의 미래가 다양성과 정의, 포용으로 향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건 단순히 ‘여성이기 때문에’ 반가운 일이 아니다. 스포츠의 미래를 보다 공정하고 정의롭게 만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변화이기에 반긴다.
“첫 번째 아테나”였다고 누군가 기록하길 바라며
커스티 코벤트리, 그녀는 분명 현대의 아테나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단지 유일한 아테나가 아니라 ‘첫 번째 아테나’였다고 누군가 기록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녀의 뒤를 이어 더 많은 여성들이 스포츠 리더십의 무대에 당당히 서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이현주 (Julie Lee) / *더킹핀 Senior Researcher, **전 유엔스포츠개발과 평화(UNOSDP) 사무국장